송민규의 회화

On the Painting by SONG, Mingyu

김광희 (전북도립미술관 학예연구사)

예술가란 무엇인가 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릇 예술가의 임무라는 것은 형식을 지배하는 데에 있지 않고, 내용에 적합한 형식을 만드는 데 있기 때문이다. - 바실리 칸딘스키

  1. 송민규의 회화는 얼핏 보자면, 그래픽의 세계로 아니 차라리 디자인의 표면으로 보인다. 오늘날의 풍경을 담은 ‘SF Drawing' 3부작과 그 스핀오프 3부작(2016~2019)에서 이 같은 인상을 부추기는 이미지 패턴을 뽑아보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선으로 운동성을 강조하는 것들(<수영장 끝에 대서양 Part1>), 곡선으로 면을 왜곡하는 것들(<13개의 달>), 그리드를 펼치는 것들(<금속과 설탕 Part1-28>[이하, '금속과 설탕'은 '… '으로 표기]), 점으로 환영을 부르는 것들(<블랙베이1~4>), 반전(反轉)으로 면을 형상화하는 것들(<…Part1-33~Part1-35>), 혹은 선으로 형태를 단순하게 강조하는 것들(<…part1-11>), 그리고 표면에 얼룩을 남기는 것들(<다른 합성 Part1>) 따위인데, 엄청난 수의 작업에 담긴 패턴을 묶어 보자면 대략 이와 같다. 다시 이를 거칠게 정리하면, 송민규의 회화는 점과 선과 면을 이용하여, (방향 또는 운동을 표상하는) 직선/곡선의 연장(延長)과 (구획과 반전으로 왜곡된) 면의 분할/재배치와 (눈에 띄거나 주변으로 녹아들게 하는) 형태의 지각 놀이로, 보이는 것과 보일 것을 표면에 평평하게 중층적으로 압착한다. 이를 담은 캔버스가 전시장에서 일종의 시퀀스를 이루며 몽타주의 효과로, 기록의 상징 효과로 제시된다.

송민규의 세계는 추상의 틀로 감각되되 재현 대상의 환기력을 지니고 있다. 꼼꼼히 보면, 그가 제시한 형상을 알아채게 된다. 하지만 패턴으로 그가 재현해 낸 것이 무엇인지 분명치 않은 경우도 많다. 그것들은 송민규의 말을 빌리면, 수영장과 헬스클럽, 소비되는 대중(/pulp) 이미지, 작업실을 둘러싼 시-청각적 풍경 요소로서, 밤의 풍경, 불빛, 비행기, 달, 항만, 소음(!), 수목 등이다. 그는 모더니즘의 의심으로 막막한 재현에 대한 거부감을 되살리고 있다. 회화가 삶에서 괴리되거나 혹은 소재주의의 퇴폐에 빠질 것을, 재현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을 느끼며 꺼렸던 것 같다. 대체로 그가 취하는 회화의 실천은 컴퓨터 그래픽 툴을 거쳐 벡터의 형식으로 대상을 단순하게 변형한, (유/무형의) 템플릿을 추출하여 캔버스 위에 아크릴로 그려내는 식이다. 회화의 표면은 ‘벡터스코프(vectorscope)’를 보여주는 화면으로 보인다. 이미지를 크기와 방향을 갖는 무늬/형으로 단순화하는 그 같은 이행/전환/등가의 과정을 고려하면, 그 패턴은 비교와 교환이 일어나는 수치의 개념으로, 함수로, 연산 된 도식이라고 할 수 있다. 송민규가 그 같은 패턴, 도식, 형식으로 실천하는 표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글은 그 사정(/valuation)을 설명하려 한다. 이 질문은, 감각/스타일(/zeitgeist)을 표면에 번안하려는 미술의 (무)의식적 실천에 관한 것이라 이해해도 좋다.

  1.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2016년 즈음 그가 고안한 'SF 드로잉'(SFD)의 프로토콜을 회상해 볼 필요가 있다. 송민규는 이를테면 앞선 예들의 형식/패턴/도식을 'SFD'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회화에서 수치제어 된 데이터의 배열은 해독을 요청하는 이진수의 연쇄로서 네트워크화된 선들(line)을 순환한다. 그것은 드로잉이 지닌 고전적 가치, 또는 '전형(/archetype)'이라는 이념에 우위에 두는 태도이다. 한편, 그것은 (뒤집힌) 알레고리이기도 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의 회화는 "영화나 소설에서 환상, 상상의 장면을 위해 사용하는 그래픽, 특수 효과에 기대어 오늘날의 풍경을 기호와 상징으로 번역, 편집하여 추상으로 위장하는 작업"[강조 필자]을 수행해 얻은 결과물이다. 'SFD'가 개인적 취미(Geschmack)이자 대중의 감수성을 반영한 일종의 수사학으로써 ‘오늘의 풍경을 번역, 편집하여, 위장하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풍경을 기호와 상징으로 위장하는 것은 그가 전형이라는 단순화에 친연성을 갖기 때문일 테지만, 동시에 그가 재현하려는 풍경이 위장으로만 가능한 또는 추상을 요청하는 어떤 것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오늘날 그림이든 문자든 재현된 풍경 이미지는 더는 배경 요소로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풍경은 하나의 인식 틀이다. 이를테면 가라타니 고진은 풍경에서 기원의 은폐를 도착(/pervert)의 구조로 들춰냈고, 김훈은 내면의 상처가 경유하는 풍경을 감각한 바 있다. 그것을 송민규가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13개의 달>, <펼쳐진 달>, <낮보다 밤이 환한 지역>, <어둠의 속도>에서, 달이다. 이때 일그러진 달은 내면의 운동을 표상하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미지로서 달은 마음의 표상으로 흔히 이해된다. 달리 생각하면 송민규의 풍경이 추상인 까닭이, 그의 회화가 내면이 굴절되어 표면에 맺힌 이미지를 담은 도식일지 모른다는 점을 암시하게 된다. 추상을 코드로 바꾸어도 상관없다. 이는 그의 초기작 <수영장 끝에 대서양> 시리즈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그것은 단순히 이국의 풍경을 담은 것은 아니었다. 표면에 담겨 있는 것은 송민규 세계의 중요한 시원(始原)으로, 태국 어느 수영장에서 마주한 '익사' 직전의 공포가 일으킨 힘(/force)의 감각이다. 그는 그 인상을 풍경에 포개고 있다. 코드를 요청하는 풍경이란, 그 같은 내면이 담긴 외부의 모양일 것이다. 다만, 나는 이 '내면'이 송민규의 마음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풍경의 전형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작품 중 하나인 <낮보다 밤이 환한 지역1>이나 <어둠의 속도>는 당시 사회의 내면을 어둠이라는 밤 풍경 속에 유비로 담은 것이어서 작가의 내면만을 풍경에 포갠 것이 아니었다.

송민규의 작업에서 그래픽적 스타일로 코드화된 풍경은 일상에서 일어나는 내면과 외부의 관계를 표상한다는 점이 또렷해 보인다. 이 점에서 송민규의 회화를 감상하는 한 방법은 내면과 외면 사이에서 상호 간섭하는 운동과 힘에 대한 명상과 기록으로 풍경을 읽어내는 것이다. 내부와 외부의 역학(力學)에 대응하는 것이 평면 위의 도식 요소라고 그의 그림을 이해하는 것이다. 패턴이 보여주듯 내면과 외부의 교류 작용이 고유한(/particular) 알고리즘을 통과하여 표면에 전사(/transcription)되어 있다. 내면을 경유하는 외면의 도착(倒錯)된 구조로 인해, 송민규의 풍경 이미지는 역설적으로 물적 상태와 심적 상태를 오가는 연속적인 흐름을 드러낸다. 다양한 층위에서 풍경은 결정(結晶)하는 힘과 분산되는 방향으로 산출되고 분류되고 위상학적으로 조합되어 평면적으로 표상된다. 멈춰있는 수평적 운동의 긴장은 수직적인 깊이에 작용하는 힘을 강조한다. 이 운동을 강조하는 것은, 표면에 번져 있는 궤적의 정지된 흐름이고 눌리거나 부딪쳐서 휘어져 있는 타원 형상이다. 중층으로 결정된 표면에서 깊이의 방향으로 수직적 교류 이동을 강조하는 이 같은 이미지는 외부수용적인 내면과 내부수용적인 외면이 작용하는 도식이기도 하다. 관객은 송민규의 풍요한 감각이 끌어낸 이미지에 부딪히게 된다.

  1. 그가 도식화한 그 같은 운동과 힘의 배치를 고려할 때, 송민규가 코드화한 풍경은 동력장치로 지탱되는 시대에 속한다. 그 시대에 풍경은 본격적으로 발명되었다. 동력장치로 지탱되는 시대라고 했지만, 비가역적인 시간, 즉 시간의 소비가 의식되는 세계이기도 하다. 우주가, 경제학적으로 해석되고 표상되는 시기라고 이해해도 좋다. 그것이 어째서 그런 것이지 설명하는 일은 다소 장황한 일일 것이다. 다만, 그 같은 경제학적 논리에서, 송민규가 풍경으로 감각하고 있는 것은 양화(量化)될 수 있는 에너지일 것이다. 에너지의 경제학적인 관심을, 도식으로 그래프화한 것이 송민규의 추상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일상에서 증가, 감소, 균등해지는 에너지의 순환과 배분을 송민규는 그려내고 있다. 그 같은 물리학적이며 동시에 심리학적인(/psychological) 이미지는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내면과 외부가 상호 반응하며 세계를 재구조화할 때, 대문자 X 주위에 있는 것들은 감정의 시점에 따라 가치를 부여받는다. 그의 작품에서 주목할 것은, 앞서 패턴들이 빼어나게 복합된 <낮보다 밤이 환한 지역1>과 <펼쳐진 달1>에서처럼, 가치 매김 되어 표면에 배치되고 있는 요소들이 지시하는 그래프화한 감각들이다.

송민규는 내부와 외부 사이에서 가치 매김 되는 에너지의 변화/변형/균형을 추적하기 위한 형식을 고안했다. 형태의 특징을 (벡터화하여) 운동이자 흔적으로 표면에 기입한다는 실천에서 중요한 것은, 모방이 아니라 약호를 상정하는 것이다. 그가 수행하는 작업은 면(/surface)를 덮어 형태를 배분하고 도해(圖解)한 도형과 선을 그어, 감각할 수 있는 것과 사유할 수 있는 것의 어떤 짜임새를 표면의 층을 쌓으며(layered) 구성해 가는 방식이다. 그 짜임새는, 디자인이라는 면에서 물질적이기도 하고 회화라는 면에서 상징적이다. 이 짜임은 감응/정동(/affect)라 불릴 수 있는 물질과 정신 사이에서 운동하는 에너지의 지정학을 표상한다고 말할 수 있다. 감응은,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근대적 이분법을 넘어가는 정신과 물질의 간극에서 순환하는 에너지 흐름이다. 감응은 최종적 표출로서, 결과가 아니라 내부와 외부 사이 이행의 과정으로만 포착된다. 그는 물질과 감정 사이의 교통 구조를 밝히고, 운동에 응시하고, 귀 기울이며, 그들이 운행하는 풍경을 조망하고 있다. 그는 수직적 평면들의 배열로 정신과 물질을 오가는 에너지의 움직임을 그린다. 그러므로 물질과 정신 사이를 순환하는 힘, 에너지는 송민규가 수행하는 미적 실천에 있어 중요한 분석 대상으로 읽힌다. 빅토르 바자렐리의 실천에서 기원했을 혹은 브릿지 라일리를 연상시키는, 그러나 옵아트를 의도하지 않은, 착시와 유사한 그의 표현을 보자면 송민규가 감각을 일깨워 가치화된 에너지의 흐름을 표면화하려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1. 이 같은 경제학적인 감각을 표면화할 때, 송민규의 작업은 회화의 자리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을까? 무엇보다도 그가 기초적인 도식을 추출하고 그 도식으로 내면과 외면의 조응과 대립을 지시하기 위해 대상을 코드화한 형태로 변형하는 실천의 효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송민규는 물적 상태와 심적 상태에서 공명하는 가치 교환적 에너지를 보여주기 위해 어떤 교통 가능한 접속 지대를, 부피(/volume)으로 그리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내면과 외면, 물질과 정신, 나와 너, 그와 그녀 사이에서 교통 가능한 미학적 공통감각이며 이를 투영할 공통표면이다. 그 표면은 "등가성의 표면"[자크 랑시에르]이기도 하다. 이 교통 방식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같은 치환과 번안을 가능하게 하는 공통 기반이며, 설령 그로부터 도출된 배열이 원래 불가능하였더라도 그런 결정(結晶)을 가능하게 하는 상호 간의 약호이다. 도식과 패턴은 교통의 공간을 조형해 내기 위한 기초 요소이다. 송민규의 작업이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단순화 작업이다. 그는 이를 템플릿으로 시도하고 있다. 사적인 장소감을 등가성의 표면으로 번안하는 <회색 개론> 시리즈를 이 같은 도식 연구의 한 경우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또 다른 강조는 등가성의 형식에 있다. 송민규는 ‘SFD’에서 삶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데이터를 드로잉 했는데 작업 초기에는 일상을 기록한 단어를 시각적 요소로 번안하거나, 이후에는 문자를 경유하지 않고 일상의 특정 경험을 세부 요소로 범주화하고 통계 내어 그 요소별 수치를 시각화하는 번안을 시도했다. 때에 따라 <낮보다 밤이 환한 지역1>의 하단에 보이듯이, 청각적 요소가 웨이브폼으로 시각화되어 표면에 제시된다. 그 같은 전환이 가능한 그래프 도식으로 그는 상호 교통 가능한 감각을 회화의 형식으로 실험하고 있다.

표면이 중층 결정되어있음에도 (그린버그의 의미에서) '평평한 표면'을 강조하거나 먼셀 사(社)의 표준화된 색상표를 이용하는 특성은, 송민규가 디자인의 영역에 친숙하다는 점과 응용 미술과 순수 미술의 구분보다는 회화의 자기 비판적 의미에서 교통 가능한 공통의 감성적 세계를 미적 실천의 방향으로 삼는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수영장 끝에 대서양>에서 감각의 투사물로서 물의 이미지가, 벡터로 치환되어 코드화/추상화되어 태국의 전통 색과 먼셀 색상표로 재현될 때, 그가 말하는 것은 인상을 공통의 감각으로 나누도록 도식화하는 작업이다. 물론 전통은 역사를 도식화한 또 다른 이름이며 먼셀 색상은 도식화된 산업주의의 상징이다. 그 같은 도식화는 어쩌면 하나의 형식으로서 상호 교통 가능한 일련의 알고리즘일 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표준화와 유사하지만, 오히려 그에게는 자기 비판적 의미에서 전형에 가까운 것일 것이다. 그는 감각의 나눔을 위해, 전형의 도식화라는 형식을 고민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1. 송민규의 표면에서 회화의 실감 획들에 큰 역할을 맡은 것은 질료의 질감이 일으키는 유물론적 감각과 우연적 요소다. 작업의 마지막에 이르러 그는 어쩌면 도식의 건조함을 제거하려는 것처럼, 그래서 삶의 증거를 표면에 부여하려는 것처럼 그래픽적 도식 위에 붓칠로 우연적인 요소를 추가하곤 한다. 그런데, 2020년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에서 선보였던 ‘경외’를 일으키는 <Wave Wave Wave>(Vinyl sheet, Acrylic, Aluminium, 300×1100cm, 2020)에서, 이 유물론적 우연의 요소는 수치 제어된 아크릴판으로 대체된다. 마치 회화의 인증처럼 보였던 요소가, 이 작품에서는 이제 회화의 가치를 보증하는 역할을 맡지 않는다. 그는 그래픽적인 것을 질료의 상상력과 등가성을 갖도록 하였다. 그 같은 실험은 이미 아크릴과 비닐 시트로만 운동을 구성한 <톱니들이 멈춘 날>에서 보였던 방식이기도 하지만 이 작업이 청감각과 시감각의 교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자의 작업과는 다른 결을 가진다. 그에게 회화의 가능성을 확증하는 것은 교통 가능한 표면이고, 그 가능성은 회화라는 표면을 운용하는 감각을 번안하기 위한, 가치를 상대화하는 템플릿에 있을 것이다. 송민규의 그래픽적인 템플릿은 회화가 감각을 교환할 수 있는 평등한 표면으로 감각의 전형을 재현한다. 모든 풍경이 수직 수평으로 분해된다는 유추는 몬드리안의 추상 풍경화가 의미하는 것이다. 유추의 방법론 또는 템플릿의 방법론은 송민규의 실천원리이기도 하다.

송민규의 교환 가능한 평평한 표면은 순간적이며 (깊이의 방향으로) 수직적인 읽기를 통해 독해할 수 있다. 2021년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결과보고전》의 <Flat Trajectory>라 제목 붙은 '가로줄 무늬/목련' 시리즈는 자연과의 친화력이 어느 때보다 강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회화의 주제로서, 궤적의 도식이 평등한 표면 위에 전형으로 강조되고 있다. 봄의 어느 날 '어떤 감상적인 공통의 형상'을, 세계와 힘과 에너지가 이루는 운동 상태를 그는 공통의 표면으로 번안했던 것이다. 송민규의 회화는 정동을 보여주는 오실리스코프라 할 만하다. 송민규가 만든 형식은 에너지가 추동하는 세계의 쉼 없는 변형을 감각하기 위한 장치로 공통감각을 나누기 위해 구축된 방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회화에 대한 송민규의 실천은 오늘날 삶의 리듬에 맞추기 위한 것이다. 이 리듬을 번안하기 위한 형식에 주목함으로써 공통 감각이 교통될 수 있는 평면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 그것이 그의 작업이 갖는 가치이다.

부기.

송민규의 작업을 감상하기 위한 또 다른 방식으로, 리듬을 추출하는 독해 또한 시도해볼 만하다. 이때, 리듬은 "불변하는 기초 요소에 합류하면서 그것에 구도와 형태, 구조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스에서는 리듬을 형태, 즉 보유하는 방식, 구조라고 말했다. 그리고 "구조라는 용어는 여러 요소의 단순한 조합과는 달리, 하나하나의 개별적인 현상이 또 다른 현상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결속되면서 그런 식으로 구축되는 하나의 통일된 단위를 가리키며 따라서 이러한 현상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지닌다."[조르조 아감벤]. 지면 탓에 이를 분석하는 것은 다른 기회로 남겨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