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니들이 멈춘 날 : 감각번역기계의 아름다운 변칙

안진국(미술비평)

Lev AAN(Art Critic)

우리가 사는 세상은 반투명하고 물컹거린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그렇고, 사람과 사물 사이, 사건과 사건 사이도 그렇다. 그 어느 것도 명확하지 않으며, 견고하지 않다. 그것은 사람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사물이 기억(의미, 내용: 심층)을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물의 표층이 기호가 되고, 상징이 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가진 기억, 그것이 가진 불투명성 때문이리라. 우리는 사물의 기억을 모두 알 수 없다. 그리고 물리적 세계의 그 물컹거림, 그 흐느적거림, 그 물리 감각을 느낀다. 아주 가끔은 그 반투명성과 물컹거림을 제거하고 싶을 때가 있다.

Black Bay, 4.09PB 3.0/0.6 : 세상을 해체하는 방식

“그러니 어둠의 속도는 빛의 속도보다 빠를지 몰라. 빛이 있는 곳에 늘 어둠이 있어야 한다면, 어둠이 빛보다 먼저 나아가야지.”

……

“어둠은 빛이 없는 것이죠. 빛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곳이요. 어둠이 더 빠를 수도 있어요─항상 먼저 있으니까요.” (엘리자베스 문, 『어둠의 속도』 중에서)

지금 송민규의 어둠은 4.09PB 3.0/0.6이다. 《금속과 설탕의 결합술》까지는 그의 어둠은 N0을 지향했다. 기호화된 잠언과 90%까지 제거된 포르노그래피, 추상화된 사물의 이미지가 중첩되어 있는 <Metal and Sugar / Part 3> 연작(12개)에서 그의 완벽한 어둠이 조금 밝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지만, 그래도 그때까지 어둠은 N0을 지향했다. N0을 향하는 것은 가장 ‘완벽한 어둠의 색(Super Black)’을 향한 투쟁이다. 하지만 ‘SF 드로잉 3부작(SF Drawing Trilogy)’(2016~2018)을 마무리 짓고, 작가 자신이 이 3부작의 번외편이라고 말했던 《코드:블랙베이(Code:Black Bay)》(2018)에서 그 투쟁은 멈췄다. 그의 어둠이 밝아졌다. 빛의 속도가 어둠의 속도를 어느 정도 따라잡은 듯 ‘적당한 어둠’이 되었다. 그와 동시에 빛은 두 개, 혹은 세 개의 색으로 분해되고, 크기가 다른 수백 개의, 어쩌면 수천 개의 미립자 망점으로 분화되었다. 이 수많은 빛망울은 벡터(Vector)가 되어 ‘적당한 어둠’을 밝힌다. 작가는 지금 달빛이 비치는 밤하늘을 4.09PB 3.0/0.6과 두세 개의 색분해, 수많은 망점, 수치화된 벡터로 보고 있다. 세상을 기호로 표기하는 방식, 이것이 송민규가 세상을 해체하는 방식이다.

작가는 반투명하고 물컹한 세상을 작도(作圖)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언어를 패턴화하고 모양자(템플릿, template)를 만든다. 세상을 계량화하고 수치화한다. 마치 지금의 어둠을 4.09PB 3.0/0.6으로 표시하듯이 세상의 불명료함을 걷어내고, 물리 감각을 고정해 납작하게 만들고자 한다. 그리고 벡터화된 이미지를 그 위에 중첩한다. 벡터 이미지는 수학의 방정식으로 이루어진 그래픽 이미지. 수치화된 이미지이다. 이로써 바짝 마른 디지털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송민규의 이미지는 흐릿함을 걷어내어 명료하고, 물리적 감각을 소멸시켜 납작하게 눌려 있는가?

여전히 송민규의 작업은 반투명하고 물컹하다. 그가 지금 밤하늘의 색으로 제시한 ‘적당한 어둠’은 DUNN-EDWARDS 페인트사의 제품인 블랙베이(Black Bay) 색으로 먼셀(Munsell)의 색상 수치에 따라 색상(hue)이 군청(PB) 4.09이고, 명도(value)가 3, 채도(chroma)가 0.6인 색이다. 하지만 이 색상의 수치가 말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밝은 검은색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이 검은색에는 달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송민규는 ‘SF 드로잉 3부작’을 마친 후 밝은 달이 밤하늘을 변화시키고 있음을 발견했다. 3부작까지는 달의 변화는 보았지만 밤은 ‘완벽한 어둠’이었다. 늘 어둠이 빛보다 빨랐다. 하지만 이제 빛이 어둠을 따라오고 있다. 주체에 집중했던 그가 어느 순간 환경을 봤다. 더 나아가 환경은 주체를 소멸시키고 빛망울만 가득하게 만들었다(<Black Bay>, 2018). 주체의 존재감은 소멸됐다. 이것은 일종의 해체인 동시에 극단적 거리두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어떻게 왔을까?

SF 드로잉 3부작 : 해체로 재구축, 정치적인 추상

송민규는 ‘SF 드로잉 3부작’을 설계한다. 그에 의하면 ‘SF 드로잉’은 “영화나 소설에서 환상, 상상의 장면을 위해 사용하는 그래픽, 특수 효과에 기대어 오늘날의 풍경을 기호와 상징으로 번역, 편집하여 추상으로 위장하는 작업”이다. 그 설계의 시작은 《수영장 끝에 대서양》(2016)이었다. 3부작 중 제1부로 불리는 이 전시는 태국에서 익사(溺死)할 뻔했던 두려운 경험 이후 수영을 배우게 되면서, 그 과정을 “고난도의 게임을 하는 게이머가 마지막 엔딩을 보기 위하여 공략집을 참고하며 노력하는 태도에 비유”(작가노트, 2016)하며 제작한 100개의 기록적 드로잉이 중심이 된 전시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정신과 마음의 언어’를 기하학적인 패턴과 유기적 형상을 중첩해 시각화한다. 일상의 소소한 경험-사건을 문구로 만들고 그 문구의 각 단어를 추상적인 시각 기호로 옮기는 실험을 한다. 다시 말해, 정신과 마음이 물컹하게 만져지는 물리적 세상을 언어로 압축하고, 다시 시각 기호로 압축했다. 그로 인해 세상은 중층적으로 압축되어 송민규의 시각 기호로 ‘최적화’ 되었다. 그의 ‘감각번역기계’가 등장한 것이다. 작가 자신의 구성적 자율성을 배제한 채 엄격하게 구축한 ‘주관’적인 논리 시스템에 맞춰 모든 것을 통제하며, 일상세계를 수렴(收斂)한 정신과 마음의 문자언어를 추상적 벡터 기호로 번역하려는 ‘감각번역기계’의 초기 모델이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3부작의 제2부인 《낮보다 환한》(2017)은 ‘완벽한 어둠’이 중심을 이루는 전시였다. 가장 ‘완벽한 검은색’은 먼셀의 명도가 0인 단계, 중성색(neutral)의 머리글자를 따서 N0인 색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100% 빛을 흡수하는 검은색을 만드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에 송민규의 ‘완벽한 어둠’은 대략 N0.75~N1이었을 것이다. 《수영장 끝에 대서양》이 태국의 전통 색채로 구현한 추상적 시각 기호를 보여준 전시였다면, 《낮보다 환한》은 완벽한 어둠에서 ‘낮보다 환한’ 지시대상을 뚜렷하게 보여주고자 기획된 전시라 할 수 있다. 작가에게 2016년과 2017년은 한국 사회의 어두운 단면, 그리고 그것이 고스란히 작가 주변에서 재현되고 있는 암울한 시기였다. 부조리와 억압, 통제로 점철되어 있던 이 ‘암흑기’가 ‘완벽한 어둠’을 불러온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시기에 광화문 광장에 촛불이 그 어느 빛보다 환하게 타올랐던 것처럼 낮보다 환한 지시대상(비행기의 궤적, 대부도의 인공위성, 인천항의 조명 등)은 감출 수 없는 정의를 상징하듯 완벽한 어둠 속을 뚫고 더욱 또렷하게 보인다.

개인적 서사와 사회적 서사를 시각 기호로 번역하는 것은 시각 기호에 기억(의미, 내용)을 심는 것이다. 3부작 중 제1부와 제2부는 결국 시각 기호에 기억을 심는 과정이었다. 이제 제3부다. 피날레(finale)다. 송민규는 제3부인 《금속과 설탕의 결합술》(2018)에서 모든 것을 걷어차 버린다. 그가 ‘SF 드로잉 3부작’을 설계한 것은 제3부를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모든 의미를 걷어차 버리는 무의미한 껍데기. 송민규는 이 작업을 위해 주위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이미지(포르노그래피, 광고, 영화 이미지 등)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 이미지의 일부를 지워버린다. 어떤 이미지는 90%까지 이미지를 상실한다. 재현성이 훼손되면서, 내용도 함께 사라진다. 표층의 식별 불가능성(재현성의 훼손)은 심층을 휘발시킨다. 작가는 이런 껍데기만 남은 이미지들을 중첩하고, 그것에 작가가 지닌 구성적 자율성을 발휘해 이미지를 조작한다. 이렇게 만든 작품이 <Metal and Sugar / Part 1> 연작 86점과 <Metal and Sugar / Part 2> 연작 9점, <Metal and Sugar / Part 3> 연작 12점이다. 어떤 이미지라도 의미에 얽매이지 않고 만들 수 있는 작업, 서사를 해체하는 작업, 서사를 껍데기만 남은 추상적 시각 이미지. 하지만 ‘해체(déconstruction)’는 ‘파괴’가 아니라, 해체라는 형식의 재구성이다. 그래서 ‘해체’는 또 다른 ‘구성’이다(해체/구성). 껍데기만 남기고 해체하는 것은 껍데기만 남게 구성하는 것이다. 의미를 상실한다는 메타 의미를 만드는 것이다. 의미를 상실할수록 의미가 커지고 “추상적일수록 정치적이다.”(김남수) 송민규는 의미를 걷어차 버림으로써 의미 없음이 가지는 더 큰 의미를 작업으로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