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그래픽의 야금술적 리듬과 생명서판으로서의 매체감각, 송민규 작가

김남수(안무비평)

#1. “포스가 함께 하기를. May the Force be with you."

#2. “비유기적 생명이라는 경탄할 만한 관념은 야금술의 발명품이자 직관이다. 어떠한 유기적 표현도 포함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생명으로 충만해 있다.” (빌헬름 보링거)

재즈의 임프로비제이션

송민규 작가와의 대화 속에서 즐거운 것은 영화 <스타워즈>를 둘러싼 오타쿠적 이야기이다. 프리퀄 시리즈까지 잔뜩 나와서 창궐하는 바람에 이 SF 시리즈는 기억 속에서 난맥을 이루지만, 송민규 작가는 정연하게 이 복잡한 크로놀로지를 질서 잡는다. 영웅신화적 내러티브에서 그리스 비극까지 이어지는 이 미국식 신화에는 기묘하게도 송민규 작가의 작업과 최근 변화를 이해하는 단초가 있다. 가령, 시작은 이런 것이다. 드로이드 군단이 거대한 우주선에서 대지로 착착 내려앉는 끝없는 장면이라든가 클론 군단이 드로이드 군단보다는 훨씬 더 무질서하지만 역시나 질서정연하게 군진을 이루는 장면이 파시즘적 숨막힘으로 표현되어 있다. 우리 같은 ‘파레노’(편집증자)들에게는 이 숨막히는 장면의 매력은 그야말로 숨막히는 주이상스이다. 지난해까지 송민규 작가와의 대화는 이 파시즘 미학의 우주적 스펙터클을 확인하는 선상이 많았다. 그러나 올해 그는 ‘스키조’(분열증자)로 변신해버렸다. 어찌된 일인가.

“반복이 지겨워졌어요, 이제는 그냥 노래하고 싶어요.” 그는 아주 소박하면서도 강렬하게 자신의 충동이 째지한 리듬과 예측할 수 없는 마주침으로 점철되는 쪽으로 흘러가기를 염원하는 듯했다. ‘스키조’는 언제나 길없는 평평한 대지 위에 두 갈래 길을 만들고, 그 두 갈래 길을 모두 평행하게 가보는 사람이다. 송민규 작가는 마치 드로이드 군단과 클론 군단이 오버랩으로 같은 우주선에서 타투인 행성에 착착 하차하듯이, 또는 다른 시간대의 그 군단들이 시간적 혼선[out of joint]을 빚듯이 그냥 ‘중첩’되는 것이다. 그는 이 ‘중첩’을 자신의 수많은 판넬로 구성된 회화매체 위에 이미지를 담는 물체이자 회화적 이미지로, 이 두 측면 사이의 상호작용과 긴장감을 엮는다. ‘중첩’이란 본래 ‘파레노’에게는 원치 않았던 것이다. 피타고라스의 별들의 운행질서, 데카르트의 해석기하학적 x축 y축 좌표계 그리고 착실하게 물리법칙을 지키는 뉴튼의 우주에서 이미지는 각각 섞이지 않고 반짝이는 별들의 신비로운 빛처럼 독자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말한다. “반복이 지겨워졌어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자, 우리는 송민규 작가가 영화 <스타워즈>에서 플라톤적 미학 세계로부터 이탈하는 컴퓨터 그래픽 이미지를 어떻게 반죽하고 어떻게 배치하는가에 관심을 기울이기 이전에 그의 실존에 일어난 변화를 먼저 물끄러미 들여다보려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컴퓨터 그래픽 이미지 월드는 어찌 보면 매우 현란한 이미지 범벅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작가의 말에 조금은 귀를 기울여야 알게 되는” 이미지의 비의가 충만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를 컴퓨터 그래픽으로 표현된 그노시스의 서판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그노시스는 시각적으로는 알 수 없지만 보다 깊은 시선에서 구성되는 비의적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송민규 작가의 고뇌와 충동은 이 그노시스의 초월 감각을 컴퓨터 그래픽 이미지로 접근하고 실험하면서 그 음악적 공명과 고차원적 놀이가 어떻게 출현할 수 있는가 하는 지점에서 맺혀 있는 듯싶다. 우리는 이 작가가 시각매체를 통해 시각적 저 너머까지 섬광처럼 유도되는 비유기적 생명성의 징후를 함께 느껴보아야 한다. 그가 지향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숭고미학’이며, 시각예술적 조건을 새롭게 툭툭 건드리는 타입의 ‘숭고미학’이다. 조금은 놀 줄 아는 ‘숭고미학’이라고 할까.

중첩의 의미

영화 <스타워즈>의 어느 시리즈에서 로봇 장군이 등장한다. “미래, 제다이가 없는 미래를 얻으려는 것이다! The future. A future where there are no Jedi!”(그리버스 장군) 이 장군은 “충성심도 신념도 없는, 프로그램만 있는 군대일 뿐이지. 그렇게 힘만 과시해서 대체 뭘 얻겠다는 건가?”라는 제다이 기사 오비완의 비아냥에 위의 대사를 읊는다. 이 격조와 품위를 가진 장군이 결투를 위해 망토를 벗었을 때, 나타나는 것은 4개의 팔이었다. 각각 4개의 광선검을 휘두르며 오비완을 위협하는데, 놀라운 것은 1개의 광선검을 가진 오비완이 차례차례 그 팔들을 잘라나가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그리버스 장군이 모차르트라면, 오비완은 슈톡하우젠이다.

그리버스 장군이 휘두르는 광선검(들)의 궤적은 고전음악의 라이트모티브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송민규 작가가 말하는 ‘반복’의 전형적 곡선, 예측가능한 곡선에 해당할 것이다. 송민규 작가의 작업 속에서 이 광선검(들)의 궤적은 1) 괘[掛] 2) 궤[軌] 라는 두 개의 한자와 관련지어지는 듯싶다. 이 작가는 ‘괘도’라는 것과 ‘궤도’라는 것을 의식하는 그래픽 이미지의 점, 선, 면, 유체에 방점을 찍는다. 거기에는 우주의 가장 순수한 생명 에너지인 ‘포스’[force]가 있을까. 본래 <스타워즈>의 기원에서 유래되는 ‘포스’는 동아시아의 기[氣]라고 할 수 있다. 이 기[氣]를 로봇은 쇤베르크 이전의 규칙적인 하모니 타입으로 광선검의 그래픽 이미지를 무수히 그려대는가 하면, 제다이의 기사는 그 이후의 무조성적인 음들의 나열처럼 ‘이탈한 궤도’로서 광선검의 그래픽 이미지를 뿌려댄다고 볼 수 있다. 송민규 작가는 자신의 작품 <어둠의 속도>에서 이 광선검(들)이 두 개의 타입으로 ‘중첩’되는 시지각적이며 음향적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기계주의적 명랑성과 생동감이 있는가 하면, 주관성의 무한 가능성을 꿈꾸는 일탈이 번뜩이는 우발성과 경이로움도 있다. 무리수적인 분할로서의 반점들과 곡선들 그리고 아나모픽한 형상들. 이제 나는 이 광선검(들)이 결투하는 밤하늘의 격전장, 시인 블레이크가 느닷없이 읊었던 선과 악의 부딪히는 공중장소를 연상하지 않고는 송민규 작가의 작품에 깃든 ‘포스’ 즉 기[氣]를 그 생명성의 징후 그대로 느껴보기는 쉽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중첩’되고 있는 이미지의 정체는 정확히 무엇인가. 송민규 작가는 이 이미지들의 구체적 출처를 환히 밝히는 것, 하이데거적 밝힘을 거부하기도 하고 동시에 약간은 힌트를 던져주기도 한다. 아무래도 이 보여짐과 보여지지 않음이라는 이중적 작동에는 필시 컴퓨터 그래픽이 테크놀로지 기반으로부터 시각예술의 장으로 전격적 유출을 감행할 때, 반드시 필요한 그 무엇이 있으리라. 가령, 밝히지 않는 방식으로 밝히거나 이미 밝히기도 했으나 웬지 모든 것이 밝혀진 것은 아닌 것. 밝힌다는 것이 곧 숨긴다는 의미도 되는 것. 이런 작동에서 아이러니는 고유한 속성이며, 송민규 작가가 자신이 컴퓨터 그래픽 작업을 마치 ‘이동 대장장이 Nomadic Blacksmith’의 일로 여기듯 그 작업은 ‘중첩’을 통해서 금속성의 쨍한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3. “운석과 천연 금속의 변화, 원광석과 금속의 함유량의 변화, 합금들의 변화, 금속에 가해지는 공정들의 변화, 특정한 조작을 가능하게 해주는 성질 또는 특정한 조작의 결과로서 발생하는 성질들의 변화.”(앙리 리메의 서신 중에서)

송민규 작가는 금속으로 작업하는 작가는 아니지만, 자신의 컴퓨터 그래픽 이미지를 깡깡 담금질하고 불림한다. 이러한 야장의 테크놀로지는 금속만이 아니라 모든 사물에 광물적인 원소로 가득 차 있을 수 있다는 논리에서 가능하다. 특히 그의 이미지즘은 물질과 이미지 전체를 이끌고 합금시키는 야금술적 울림으로 발생한다. 그가 ‘중첩’시키기 이전에 그 이미지들은 “어둠의 속도”라는 장소이자 영토 개념으로 표현된 작품 속에서 1) 어둠 속을 뚫고 지나가는 자동차 헤드라이트 2) 밤하늘을 나는 흰 새의 비행 3) 리아스식 해안이 가진 들쑥날쑥하고 무한한 프랙털 무늬 4) 생명수의 난데 없는 상징처럼 유체 운동중인 정액[sperm] 5) 상승하는 바람의 난류 6) 동굴 속의 벽화에서 발견되는 기하학적 문양 7) 시공간이 아인슈타인의 교리문답을 따라 확 꼬부라지고 휜 왜상 8) 방정식으로 표현될 수 없는 구름 9) 끊어진 시간을 포함한 영화 필름 10) 식물들의 이미지 등등 각양각색의 자연물을 연상할 수 있다. 송민규 작가는 자신의 작업 과정에서 마치 거푸집을 깨듯이 이 자연물이라는 출처를 끊고 독자적이며 고유한 이미지로 변조하고 배치한다. 여기서 변조란 연속적인 이미지를 위해서 거푸집을 깨는 것이다. 배치는 이미지(들)의 물질적 흐름을 그 내재적 힘의 법칙으로 다스리는 작업이다. 얼핏 연상되는 구체성의 세계라면, 송민규 작가가 ‘시스템’이라는, 마치 ‘죽음의 위성’ 같은 악의 결집체가 표방하는 이미지가 되겠다. 그러나 그는 수많은 계열과 트랙의 이미지들이 딱히 구체적인 기호로 읽히기보다 추상적 기호이자 생명적 기호로 읽히기를 원하는 듯싶다. 보다는 우리 내부의 신경 시스템에서 ‘시냅스’라는 빈 지역에서 일어나는 섬광의 무늬가 거대한 공간에 외화되는 듯한 상응성[correspondence]의 느낌도 강하다. 무엇이든 이 구체성을 벗고 추상적 고도를 찾아서 자기의 차원을 찾아가는 매체라고 할까. 그런 시각매체로서 이 매트릭스 판넬은 그 에너지적 조건과 위상학적 조건을 버무리는 작업을 통해 비유기적인 생명 리듬을 발생시킨다. 나는 이를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과 기계가 함께 연합한 ‘생명의 서판’이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