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희 (국립아시아문화전당 학예연구사)
송민규는 2012년쯤부터 최근까지 (정보를 시각화한) 회화를 그려 오면서 그 이미지를 자기 육체와 감정의 상관성을 분석하여 기입한 도식圖式이라고 말하곤 했다. 대개 작품 제목으로 그림의 ‘실제 형편’을 밝히면서, 평평한 그래프 도형의 디자인 패턴들로 자기 정서affect의 진폭을 반추상적(혹은 반구상적) 풍경에 투영하는 형식의 기법을 발전시켜 왔다. 그의 회화는 관념적 관계나 구조를 드러내는 부호이면서 그 상태 변화의 역학力學 관계를 추상화한 그림이라는 점에서, 다이어그램 이미지라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이다.[1] 2024년 《첨벙》(레이블 갤러리, 서울문화재단 후원)에서 선보인 것은 그 같은 방법의 최신의 것으로, 이를테면 <수영장-x>라 이름 붙인 (수열을 매긴) 일련의 회화가 전형적이다. 이들 회화는 이미지를 읽기 위한 일차 정보로 단어(이를테면, “수영장”)를 제공하고, 일상의 여느 사건을 겪은 내면을 외부의 풍경으로 비추는reflected 동시에, 내면의 풍경을 관념적 정보로 치환한 (그와 주변의) 환경 정보 값을 평면 위에 양식화하고 있다.[2] 캔버스의 표면에서 각 약호들의 이미지는 연결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수영장> 시리즈의 이미지는 대체로 부표나 물결, 타일 마감, 사다리 계단 같은 도식화한 부분으로서 수영장의 이미지를 지각할 수 있다), 분리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그럼에도 그것이 장소의 이미지를 구체화하여 완벽한 환영으로 종합하진 않는다), 그림의 구성 원칙으로 보자면 그것들은 디자인이라는 동일한 원리로 뭉쳐 있다. 거기에는 읽는 것(그래프이든 문자이든)과 보는 것(그래프이든 풍경이든)에 대한 동질성이, 내부와 외부의 추상적 연속성이, 풍경이면서 관념인 이미지의 표면에 어느 정도 설정되어 있다. 그렇다면, 송민규의 다이어그램 이미지는 회화 역사의 어떤 패러다임과 관계하는가?[3]
내가 보기에 송민규가 전념하는 다이어그램 회화는 디자인을 빌어 회화의 순수성이나 회화적 제스처를 다시 성찰하는 데 관심을 두는 것도 아니고, (많은 회화가 하듯이) 사회적 외상을 '풍경'으로서 드러내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일과 힘과 에너지 추이verctor의 그래프를 통해 인간적이며 지구적인 운동의 격변을 시각화하거나 '행성적인 것'의 공간을 재구상하는 것도 아니다. 자아를 ‘고백’하는 것도 실은 아닌 듯한데, 작가 스스로가 힘주어 말하는 것이 자신의 회화는 내면과 외부의 관계를 표상하는 그래프이며 그 운동을 시각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라고 힘주어 말하더라도, 그의 다이어그램 회화가 자아를 반영하는 내밀한 정보나 '메시지'로 명료하게 수신자에게 전달하는 것은 아니며[4] 회화의 표면에는 실제로 내면과 외면이 모두 기호화되어 관객이 (관음증적으로) 몰입하여 들여다볼 만한 '정서의 풍경'이 불분명하다. 확실히 주제적 측면에서 그의 회화가 말하는 것은 모호하다. 이 모호성은 또 다른 측면에서 시각적으로 두드러지는데 내면이란 어떤 면에서 오직 기호로만 표현가능 한 것이면서 동시에 기호 체계를 초과하는 것이어서, 다이어그램 회화에서는 그 초과한 표현의 양가성이 강하게 암시되어 풍경은 불투명한채로 남아 있다.
이 같은 양가성이 보다 강조되는 곳이 송민규 회화의 형식이다. 형식에서 보자면, 다이어그램 회회가 주체의 (감각) 정보를 펼칠 때, 이 자연적이며 관념적인 패턴은 정보의 도식tabular이자 내면의 제도drawing로 구성되고 그것은 확실히 '디자이너로 훈련된 미술가'의 부류에 속한다.[5] 다이어그램 이미지는 현대(포스트 기계시대)의 회화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얼마간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고, 팝 아트가 발견하고 몰입한 감수성으로 이미지 문화에 대한 선호가 엿보이다.[6] 송민규의 회화는 미적인 배치와 비율과 (기계적, 산업적) 효율의 문제로서, 이데아적이며 고전적인 최상의 비율을 추종하는 디자인 ‘미학’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면서 동시에 깊이가 제거되어 오직 표면에만 집중하는 세속적인 외양을 추종하는 스펙터클 이미지 같고(이 같은 '플랏'한 외양은 3차원 도식에서 더 두드러진다), 이 점에서 다이어그램 회화는 대중문화와 고급 예술의 상관성과 관련하여, 회화가 다루는 내용에서처럼 모호한 태도를 보인다. 송민규는 바로 이 두 표현이 일으키는 긴장을 탐색하고 활용하고자 하는 면이 있어 보인다.
이 같은 모호한/양가적 이미지가 그림 같기도 하고 디자인 같기도 한 다이어그램 회화다. 송민규가 대중문화적인 이미지를 선호하면서도 여전히 고전적 타블로의 형식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그가 들려준 말을 내식으로 읽자면) 모던 디자인을 이루는 기계적인 감각에 대한 미술의 부정성에 맞서, 회화의 (관습적) 유효성으로 기계적 감각을 회복하기 위해서다.[7] 이 점이 6~70년대 미국식 팝 아트로부터 연접하면서 이접하는 지점이다. 송민규는 ⟪첨벙⟫과 그간의 작업 프로세스와 관련하여 내게 “기계가 되고 싶다”라는 말을 내뱉은 적 있다. 뒤이어 디지털 이미지 추출 모델인 “DALL-E가 만들어 낸 그림은 (적어도 현재까지 보여준 이미지를 두고 말하자면) 너무 싫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저 말을 우리는 정밀성, 적합성, 매뉴얼화에 대한 욕망이자 기계적 프로세스를 향한 전념, 테크놀로지를 이미지로 구현하는 것에 대한 감각적 선호라고 읽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다이어그램 회화’를 두고 곱씹어 보자면 대중문화의 이미지만큼이나 테크놀로지의 감각을 현대 회화의 주요 기준으로서 보는 그의 관점을 발견할 수 있을 듯하다. 송민규는 회화와 기계의 상관관계를 다루고 있으며 디자인을 통해 순수 예술과 정보의 관계 또한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다이어그램 회화는, (다소 시대착오적으로 풍경으로서, 그러나 2024년 Open AI의 등장 이후 너무나 당대적인 풍경으로서) 기계 이미지가 새롭게 구성한 주체를 다루는 것으로서의, 외면과 내면이 맞닿은 기술 문화에서 파생한 기호와 디자인에 관한 성찰처럼 보인다. 송민규의 다이어그램 회화의 이미지가 캔버스 안에서 서로 연결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분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동시에 상관과 단절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면, 그것은 현대적 심미성으로 조화를 이루어 딱 맞는 배치-알고리즘을 의도하는 포스트 기계 시대의 디자인 테크닉 때문이다. 송민규의 회화는 서로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딱 맞는 배치가 될 만한 지점을 자유롭게 반복적으로 연산하는, 기계주의의 감각 실천에 대한 물음이 내재한다.
다른 한편으로 송민규의 회화는 뉴미디어나 포스트-매체가 대체한 미술의 시공간에서 오로지 회화에 전념하려는, 그 같은 전념이 주제를 이룬다(팝 아트의 대중문화에 대한 전념처럼). 이때 그의 전념은 기계 미학을 추구했던 시대로부터 변화한 오늘의 시공간에서 오히려 더 유효한 것으로, 송민규의 회화는 기계와 대중문화의 욕망이 재구성한 회화의 이미지를 반영하면서 감각의 정보 기술이 순수예술의 의식에 어떻게 개입하고 있는가를 회화의 형식으로 도식화한다.[8] 혼동하지 말아야할 것은 송민규의 관심이 어느 정도는 정서(의 프로세스)를 기계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지, 정서를 갖는 기계를 그리는데 있지 않다는 것이고, 그 점에서 그의 회화는 초기 사이버네틱스 구상의 목표처럼 보이기도 하다. 그의 회화는 기하학적 표상으로서 공간과, 역동적 에너지의 흐름으로서 정서적 요소가 상호 작용하면서 생태(ecology)를 그린다.[9] 달리 표현하자면, 송민규의 회화는 주체의 정서나 내면의 정보를 ‘크기와 방향으로 정하여지는 양, 힘, 속도, 가속도 따위’의 흐름이나 패턴, 즉 물리학에서 ‘벡터’라는 불리는 운동으로 표현한 디자인으로, 그 디자인은 유기주의와 기계주의가 얼마간 뒤엉킨 것이다.
이 같은 주제는 50~60년대 미국의 팝 아트가 다룬 주제를 변용한 것으로, 감각을 정보로 전달한다는 측면에서 보더라도 다이어그램 이미지의 작용은 첫 번째 기계시대의 모던 디자이너들, 이후 팝아트가 탐구했던 주제 즉 소비자로서 주체성이 등재되고 산업디자인의 감각에 영향 받은 이미지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일 같아 보인다. 서구의 팝 아트는 수정주의 모더니즘 디자인의 영향에서 “회화란 정보를 늘어놓는 평평한 다큐멘터리 표면”이라는 관점을 제시한 바 있고, 송민규의 다이어그램 회화는 확실히 서구적 모던 디자인 사조를 얼마간 연장하고 있으면서 회화의 전통으로 긍정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송민규의 다이어그램 회화를 복고주의의 어떤 경향 혹은 유행에 불과한가 하는 물음이 뒤따를 수도 있을 것 같다. 동시대의 많은 회화 작가가 사진을 밑그림으로 활용하거나 대용량 기억 장치로 사용하면서, 포스트 기계 복제 시대의 급진적인 것(가령, 미술의 아방가르드나 팝의 펑크 같은 것)보다는 일종의 복고적이며 수구적 형식의 표면적인 것(가령, 슈퍼-플랏이나 로우파이 같은 레트로 BGM 같은 것)으로 추구하면서 퇴행할 때, 이 같은 형식과 표현이 긍정(하거나 때로는 비평)하면서 추구하는 것은 포토제닉한 회화 혹은 ‘수제 레디메이드’ 또는 공학적 패턴( ‘글리치’) 같은 기계적인 것에 대항하는 이미지의 양태다. 대항이 아닌 ‘전념’을 의도하는 송민규의 회화가 레트로의 유행에 서지 않은 채 기계주의나 팝 아트, 모던 디자인의 탐구를 지속한다면 그것은, 우리 시대의 주체가 여전히 기계주의과 유기주의의 미학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1] 다이어그램은 ‘그래프’라는 말로 흔히 부르는 시각화의 기법으로 통상, 수량, 관계, 과정, 추이를 다루는데, 정보 값을 2차원이나 3차원의 표면의 기호 틀로 추상화하여 제시하는 표상 장치다. 송민규는 다이어그램의 이미지를 주로 평면 회화에 그리지만, 얼마간의 변주로 비닐시트를 이용해 이를 공간에 설치하기도 한다. 또한 초기 일부 작품에서는 환영의 기법을 좇은 작업도 있으나 이 역시 기호적 성질을 강하게 드러냈다. 한편, 나는 ‘다이어그램 이미지’를 팝 아트 작가인 리처드 해밀턴의 미술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 ‘타블라 이미지’(tabular image)와의 상관성을 얼마간 의도하면서 사용했다. 핼 포스터, 『첫 번째 팝 아트 시대』, 조주현 엮 (워크룸, 2021), 35~93쪽 참고.
[2] 송민규가 ‘템플릿’의 프로세스로 회화 작업을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비교적 다작하는 작가라는 점은 놀랄 일은 아닐 텐데, 그의 작업을 헤아리려는 시도로서 향후 재분류를 염두하고, 여기서는 24년 서울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은 전시 《첨벙》(레이블갤러리, 서울)의 최근 작업에 관해서만 쓴다.
[3] 이 같은 물음으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송민규가 파고드는 '현대 디자인'(Modern movement)의 또 다른 모델이다. 다만, 물음의 방점은 다이어그램 이미지의 의미와 형식이 어떤 창작 원리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의문보다는 송민규가 디자인과 대중문화와 현대적 주체 감각의 상관성을 진지하게 다뤘던 모던 디자이너와 팝 아티스트와 나누고 있는 역사적 문화적 대화에 있다. 내 생각에는 그 같은 비평에서 동시대의 회화가 추구하면서 동시에 감추고 있는 이미지 문화의 양가성(공모하면서 거부하는 미술의 지대)이 드러날 것인데, 송민규의 회화는 그 의미를 가시화하는 시사점을 담고 있다.
[4] 송민규는 반복에서 그의 회화가 자신의 경험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다이어그램 이미지를 회화로 그리는 이유를 명료하게 제시하지 않는다. 다이어그램 이미지에 대한 당위는 무엇을 그렸냐는 물음에 대한 모듈화한 설명만큼이나 구성적이다.
[5] 팝 아트에 전념했던 리처드 해밀턴, 로이 릭턴스타인, 앤디 워홀, 에드 루셰이 등이 이 부류의 선구자이다. 핼 포스터, 같은 책, 22쪽.
[6] 여기에는 회화 작가로서의 망설임 또한 배어 있는 것 같다. 송민규가 들려준 말에 따르면,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으로의 진학은 미술작가로서의 꿈을 이루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학업 중에도 조형예술의 학우 보다는 디자인 전공의 무리와 더 어울렸으며, 졸업한 이후 디자인 회사에서 인턴으로 잠시 근무하기도 했다. 그 같은 기호는 그가 산업디자인 같은 대중문화의 영역에 더 끌렸다는 것으로, 미술의 (준)자율성보다는 미술과 문화의 투영 작용에 더 반응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디자인에 관한 그의 태도는 다소 소심한 데가 있다.
[7] 송민규의 회화는 다이어그램으로서 키치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데 이에 대한 추종의 성격도 갖는다.
[8] 이 같은 모순적 태도는 앞서 많은 팝 아티스트들의 태도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핼 포스터의 같은 책을 참고.
[9] 생태라는 용어는 생물학자이자 동물학자인 에른스트 헤겔이 고안한 말로, “유기체와 이를 둘러싼 외부 세계의 관계에 대한 일체의 과학‘을 뜻한다. Yuk Hui, Machine and Sovereignty: For a Planetary Thinking,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24), 4쪽을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