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휘
송민규의 회화는 언뜻 봤을 때는 캔버스 위의 붓질이 아닌 컴퓨터 그래픽 결과물로 보이기도 한다. 사실 작가는 여러 그래픽 툴에 대한 숙련자로서 웬만한 편집 디자인은 직접 할 수 있고, 자신의 회화에 사용하는 템플릿을 만들 때 그래픽 툴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화가들이 회화 작업에 디지털 카메라나 그래픽 툴을 동원하고 있고 정도의 차이가 있더라도 이 툴들은 일상화 된 것과 다름 없으니 송민규도 비슷하게 일상에서 익숙해진 툴들을 작업에 활용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그는 이 툴들을 사용해 그의 평면에 끊임없이 개인적인 기호를 만들어 배열하고 있으며, 이 평면을 컨트롤 하려는 의지가 매우 강한 화가라는 것, 그리고 언뜻 무의미한 추상회화로 비춰질 수 있지만 그 심연에 내러티브를 숨겨 놓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작가는 향우 계획으로 의미를 걷어내고 표피만 남는 회화를 시도하고자 한다고 말한 바 있는데, 이 글에서는 향후 작업에 대한 기대감을 안고 근작들에서 드러나는 개인적인 기호의 생산 형식이라는 측면에서의 회화, 그리고 내러티브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송민규의 최근작 시리즈 SFD는 사이언스 픽션 드로잉(Science Fiction Drawing)의 약자로 스타워즈와 같은 공상과학 영화에서 보여지는 그래픽과 특수효과, 또는 사운드 표현에 대한 회회적 재해석이 오버랩 되어 있다. 실제 공상과학 영화의 마니아라고 밝힌 송민규는 그러나 이러한 SF 영화로부터 내용상 작업의 모티프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정신과 마음의 언어를 시각화’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100여점이 넘는 드로잉들을 ‘일상의 여러 이야기들이 픽션의 형식으로 재해석되는 지점의 기록적 형태’라고 말한다.[1] 사실 그의 작업은 작가가 일상 속에서 경험하고 느끼는 우리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단상이자 주관적인 기록이다. 또한 거의 매일 규칙적으로 작업을 생산해내는 행위를 작가 스스로 ‘혹독한 정신적 수련 혹은 감정적 노동’이라고 표현했듯이 작가 자신이 고안한 상징 시스템 안에서의 미학적 실천이라는 전제 하에 작업 습관을 채찍질 하는 정신 노동의 산물이다. 그런데 기하학적인 형태의 반복, 작가의 손길이 드러나지 않는 매끈한 붓질, 그리고 정량적인 색채는 가까이 다가가서 보지 않는 한 회화라기 보다 모듈을 활용한 컴퓨터 그래픽에 가깝게 느껴진다. 미술사학자 이자벨 그로(Isabelle Graw)는 “회화는 고도의 개인화된 기호학적 활동(a highly personalised semiotic activity)”이라고 하여 회화를 기호의 생산 형식(a form of production of signs)으로 보았다.[2] 그의 말은 송민규의 회화에 적용하기에 꽤 적합해 보인다. 송민규의 회화 속에 등장하는 모티프들이 기호학의 도상, 지표, 상징 이 세가지 요소 중에서 기호와 의미의 관계가 가장 자의적이자 임의적인 ‘상징’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기 때문이다. 송민규의 《수영장 끝에 대서양》전에 포함되었던 ‘SFD Part 3’ 드로잉 연작 100점에 대한 제목 리스트를 보자. 이 연작의 제목은 <야심적이고 의욕적인>, <서 있는 곳이 달라지면 풍경도 달라진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정상 범주에 들지 못하는 사람을 배척하는 비주류들>, <맞춤법 검사기>와 같은 식이다. 시각적으로 이 작품들은 몇 가지 모듈과 패턴이 반복되고, 색상도 청색, 갈색, 회색, 보라색 등 소수의 색상이 반복해서 쓰인다. 송민규는 SF 영화나 게임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법칙인 무중력, 파괴, 안테나, 광원, 기계적 표현 등에서 영감을 받고, 우주선들의 발사체에서 사용되는 레이저 광원 효과, 그것에 의해 파괴된 이미지의 표현법에서 SFD 시리즈의 시각적 요소들을 착안하였다. 그에 의하면 SF 영화에서는 극적인 파국의 순간에 시각적으로 직선과 곡선이 뒤엉킨 조형이 등장하곤 하는데, 그는 이러한 순간의 조형적 표현에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특정 패턴을 동일하게 반복하기 위해 아크릴을 레이저 커팅하여 물리적인 템플릿을 만들고 이를 스텐실 방식으로 캔버스 위에 찍어낸다. 드로잉 1점에 서너 개 이상의 템플릿이 사용된다.[3]
송민규가 사용하는 기하학적 도형들은 1980년대 활발했던 네오-지오 혹은 시뮬레이셔니즘 작가들 중에서 피터 핼리(Peter Halley)의 작업을 연상시킨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1975)과 쟝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시뮬라크르 이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핼리는 1980년대 들어와 현대 사회에 만연해 있는 기하학적 지시대상을 코드화 하려 사각형이나 바 형태를 사용했고, 산업소재를 연상시키는 쿨 톤의 안료를 사용해 엄격하게 도식화된 회화를 제작했다.[4] 특히 핼리는 1984년에 ‘기하 추상의 위기’라는 글을 발표한 바 있는데, 이 글에서 그는 기하학적 형태(geometry)가 한때는 안정, 질서, 비율의 기호였다면 이제는 감금과 제지를 나타내는 기표이자 이미지로 변화하고 있다고 하였다.[5] 핼리는 도관(conduits)과 감방(cells) 이미지 등 기하학적 형태를 사회, 문화적인 메타포로 사용하였고, 특히 그에게 이전의 추상회화의 침묵은 컴퓨터와 전자제품의 빛이나 소음으로 대치되었다. 또한 그는 바넷 뉴먼이나 마크 로스코의 작품이 숭고보다는 전자시대와 산업사회의 조건을 반영한다고 보며, 전자가 산업과 노동자에 연관되고 후자의 공명이 영상 없는 텔레비전 화면의 진동과 유사한 것에 매력을 느낀다고 하여 이들 작품을 사회적인 이슈와 연결시켰다.[6]
핼리가 1980년대 산업화된 현대사회 속 질서 및 억압의 구조나 재화 시스템을 기하 추상과 연결지어 생각했듯이, 송민규도 사회에 만연해 있는 부조리, 억압, 통제에 대한 반발과 분노를 그가 만든 기호들과 템플릿에 담고자 한다. 예를 들어 <SFD Part 5-5>(2016)에 쓰인 타원, 사각형, 점선 이 모든 요소들에는 나열 및 반복 횟수, 선의 두께와 방향, 색상에 작가가 정한 각각의 상징과 의미가 있다. 그러나 작가는 제목에서조차도 그 의미를 드러내지 않는데 이는 자기 검열의 습관과 관련 있어 보인다. 그는 추상을 정치적인 것과 연결시켜 ‘추상적일수록 정치적’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7] 이 말은 작업의 진정성에 대한 고민과 더불어 정치적 견해를 노골화 하기보다는 은밀히 하고자 하는 태도에서 기인한 것 같다. 그는 작업에 임하는 것조차도 정신적 노동이자 반복적인 훈련으로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송민규는 이젠하임 제단화와 같이 작품 속에 담아 있는 알레고리가 중요했던 서양 중세 그림들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중세 회화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게 하기 위해 알레고리와 상징을 사용한다. 그러나 자신은 중세 회화와는 정반대의 전략으로 눈에 보이는 것을 눈에 보이지 않게 하고자 한다고 말한다.[8] 역시 그는 자신이 만든 내러티브를 굳이 관람자에게 드러내지 않으려는 것이다.
한편, 지난 가을 175갤러리에서 열렸던 2인전 《듀얼 채널 픽션》에서 송민규는 자신의 작업과 관련하여 ‘픽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작업의 모티프이지만 시각화 과정에서는 주관적인 상징 시스템 안에서 추상적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송민규는 자신의 작업을 ‘픽션’이라고 일컬었다. 또한 일상적인 이야기를 추상적으로 시각화 하는 과정에서 엄격한 규칙을 따른다 하더라도 과정 끝에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는데, 작업 과정 속에서 추가되거나 삭제되는 의미들이 있고 그 결과 작업은 픽션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9] 그는 세상사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반응을 화면 위로 가져올 때 논리와 통제를 추구했지만 변칙과 우연을 완전히 비껴갈 수가 없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완전한 상상이나 지어낸 허구가 아니라면 픽션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데, 송민규가 추상화의 과정, 그리고 변칙과 우연에 의해 의미가 편집되는 것을 픽션으로 생각하는 엄격함은 향후 작업에서 집중적으로 파고들어야 할 부분으로 보인다. 그는 근래 자신의 시도에 대해서 3단계 계획이 있음을 설명한 적이 있는데, 1단계는 2016년 집중적으로 진행한 ‘픽션’ 작업이고, 2단계는 2017년에 진행할 작업으로 형식적으로는 이젠하임 제단화와 관련될 것 같다. 그리고 3단계는 내러티브가 빠진 소위 껍데기 뿐인 그림, 즉 회화의 표피에 좀더 치중한 회화를 작업할 예정이라고 하였다.[10] 내러티브를 구성하지 않고 조형성만을 추구하겠다는 뜻인데, 그러면 화면 안에서 시스템을 구축, 통제, 편집하고자 하는 그의 욕망은 어떻게 변화하게 될까? 앞서 인용한 이자벨 그로의 말처럼 오늘날의 회화는 “고도의 개인화된 기호학적 활동”이 되어 버렸고, 송민규의 회화도 개인화된 기호를 생산하고 있다. 특히 그가 만드는 기호의 의미작용은 내러티브를 숨기는 상징화 과정에서 발생한다. 이 과정이 생략된 무계획의 회화를 실천하는 것은 가시적인 것을 비가시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그대로를 드러내는 것이 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문득 그가 별다른 설명없이 지나가는 말로 했던 ‘감각번역기계’라는 말이 떠오른다. 만약 회화가 시감각의 번역기계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완벽한 조형성의 추구가 되지 않을까.
[1] 송민규의 작업 노트, “픽션에 단상”(2016)에서 인용.
[2] Isabelle Graw, ”The Value of Painting: Notes on Unspecificity, Indexicality, and Highly Valuable Quasi-Persons," Thinking Through Painting: Reflexivity and Agency beyond the Canvas (Berlin: Sternberg Press, 2012), 45.
[3] 최정윤, “시각 매뉴얼을 따라 이미지를 생산하는 수행자: 작가 송민규 인터뷰”(2016)에서 인용.
[4] Peter R. Kalb, Art Since 1980: Charting the Contemporary (London: Laurence King Publishing, 2014), 124.
[5] Peter Halley, "The Crisis in Geometry", Arts Magazine (New York, June 1984), Vol.58, No.10 (www.peterhalley.com/ARTISTS/PETER.HALLEY/Crisis in Geometry.FR2.htm에서 재인용).
[6] Michael Auping, Abstraction, Geometry, Painting (Abrams, 1989), 88 (강태희, "미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관하여," 『현대미술의 문맥읽기』(서울: 미진사, 1995), 76.
[7] 필자와의 대화(경기창작센터, 2016.12.10)
[8] 필자와의 대화(경기창작센터, 2016.12.10)
[9] 김소윤, "듀얼 채널 픽션," 《듀얼 채널 픽션》(175 갤러리, 2016.10.1~16)의 도록(서울: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연구소, 2016), 페이지 표시 없음.
[10] 필자와의 대화(경기창작센터, 2016.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