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
“생산적인 것은 정주가 아니라 유목이라는 것을 믿으라.” - 미셸 푸코
송민규의 작업의 기반에는 관념적 미술에 대한 비판이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지점은 작업의 내용인 이미지를 산출하는 방식과 그것을 ‘재현’하는 방식 덕분이다. 그는 이미지 생산을 위한 매뉴얼을 만든 후 모든 공정을 이에 맞춰 진행한다.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이미지와 의미를 분리시킨다. 곧이어 의미가 사라진 이미지를 변형시킨다. 기호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이미지는 빈껍데기가 된다. 그것은 기표로서의 지위마저도 없애버리고 오롯이 의미의 공백 상태인 실존의 시각적 대상으로 남는다. 이제 껍데기 이미지는 벡터값으로 환산된다. 이미지로서의 성질은 숫자로 대체되고 원래의 형상도 이젠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니까 그나마 남아있던 최소한의 기호로서의 흔적조차도 이 공정을 거치면서 의미가 완전히 제거된 이미지로 산출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지와 의미의 관계항을 사라지게 함으로써 그가 얻는 게 무엇인지 물어보아야 한다. 사실 중요한 것은 의미의 제거가 아니다. 오히려 은유의 제거가 더 정확한 표현에 가까울 것이다. 송민규는 은유를 제거면서 의미의 무게와 관습도 함께 소거시킨다. <금속과 설탕의 결합술>(2018)의 경우, 그가 선택한 이미지들은 대부분 포르노그래피, 광고, 영화 이미지로 그 기원과 문맥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각각의 이미지들이 선정되는 엄격한 기준 대신 우발적이고 충동적인 면이 더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겠다.
우선 송민규의 공상과학드로잉(Science Fiction Drawing, 2016~2018)은 3년간 3부작으로 기획된 전시 프로젝트로 그 자체가 작가의 영화적/허구적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 그렇다고 각 전시들이 정확한 스토리를 전개하는 건 아니다. 드로잉을 기반으로 한 이미저리(imagery)는 기호로서의 의미가 지워진 상태이기에 수많은 드로잉들은 결과적으로 일종의 환경에 더 가까워보인다. 이유는 분명하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송민규는 자신의 경험을 재현하기보다 그것들을 자신만의 기호와 상징으로 위장하기를 즐긴다. 물론 이 기호와 상징은 개인적인 영역에 머물기에 하나의 약호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지는 못한다. 허나 이러한 작업 방식 혹은 사적 취향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태도는 문화적 의미에 더 무게가 실리는 듯하다. “낮보다 밤이 환한 지역” 연작(2017)은 표제가 시각정보보다 더 많은 설명을 내포한 작업이다. 알 수 없는 기호들로 채워진 화면은 마치 계기판의 좌표처럼 작가의 일상 기록지에 가깝다. 직접적으로 지시하지도 재현하지도 않으면서 공유할 수 없는 기호들은 의미 대신 정서적 공감대를 자극시킨다. 공상과학매니아 또는 ‘덕후’ 문화에 익숙한 부류의 사람들에게 그의 이미지는 시간을 초월한 세계의 기호처럼 느껴질 것이다. 3부작의 마지막 편인 <금속과 설탕의 결합술>에서는 제목이 지시하는 이질적인 단어의 조합처럼 우발적인 관계 맺기로 형성된 세계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의도하는 기호와 의미의 분리와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방식으로 생산하는 수많은 의미-없는-시각정보는 무엇을 보여주기 위함일까? 한 가지 더 덧붙이지자면, 애써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완성한 매우 인공적인 이미지들을 굳이 본인이 기계처럼 다시 그리는 이유도 궁금하다. 반대로 개인적으로는 공상과학적 세계관은 작가가 의도하는 것만큼 가깝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단, 작가가 공상과학이란 주제로 어떤 특정한 세계관을 제시하지 않는 대신 그 허구세계를 얼마만큼 즐기고 향유하고 있는가는 충분히 전달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그의 작업 방식이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는 키덜트 소비문화의 압축판으로 볼 수 있는데, 소비와 생산이 중첩된 이 과정이야말로 비기능적이고 비자본적인 생산을 지속한다는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의 작업은 생산이 곧 소비이고 이는 매우 충동적인 강박에 의하여 반복적으로 재생되는 탈자본주의의 과정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이제 그의 그리기 방식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사실 작업 초기에는 그도 도시를 구성하는 표상들을 재현하는 회화를 그리곤 했다. 형상의 재현은 대상을 지시하기에 어떤 식으로든 의미를 갖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미지의 재현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자신이 만든 원칙에 따라 이미지를 생산하는 방식을 선택한다. 여전히 캔버스 아크릴 페인팅을 고수하지만 회화적 물성과 질감을 최대한 배제한다. 스스로 기계가 되어 무관심한 회화를 생산하는 게 목적이 된다. 무관심의 관심을 가진 칸트는 아름다움은 보편적인 것으로 무관심한 쾌를 전달하는 대상으로 여겼다. 무관심의 관심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작가 스스로 감정의 (절대적안) 통제를 수행해야만 한다. 어쩌면 김남수 비평가가 그의 작업을 두고 “조금 놀 줄 아는 숭고회화”라 평한 것도 이해가 된다. 숭고라는 개념이 여전히 내겐 다소 부담스러운 것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여하튼 송민규는 공상과학드로잉 3부작을 통하여 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시각이미지를 생산하는 기계-되기를 시도한 것 같다. 추상적 이미지 혹은 기의가 부수진 기표들은 성장과 경쟁으로만 구성된 자본사회가 요구하는 권력의 재현을 거절하는 반항의 제스처다. 반항은 분열적인 충동을 수용함으로써 재현성에 내재하는 의미를 분쇄하는 것으로 표출된다. 들뢰즈/가타리는 오이디푸스 신화를 통하여 반복적으로 개인의 욕망을 병리학적 기제로 활용할 뿐만 아니라, 존재 자체가 아닌 그것의 의미에 권위를 부여하는 정신분석학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우리는 관습적으로 욕망과 결핍을 연결 지어 안정적인 세계를 (무의식적으로) 재현한다. 그런데 “욕망은 결여와 관계가 없으며 재현의 질서를 벗어나는 충만한 힘 자체라는 것이 욕망에 관한 들뢰즈의 입장이다.” “안티 오이디푸스”는 그들이 반복적으로 주장하는 인간의 기원을 보다 적극적으로 다루고 있다. 관념이 되어버린 신학적 관점의 기원은 중요하지 않다. 인간의 본질은 존재하지 않고 그 자리에 욕망이 있다. 여기에서의 욕망은 생명의 움직임이고 끊임없이 자신을 만드는 과정으로서의 생성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관계가 대표적인 예이다. 그들을 서로 접속하여 새로운 존재-되기를 시도한다.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자 하나인 그들은 접속에 따라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이 과정이 가능한 것은 다른 것이 되고자 하는 욕망 덕분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욕망을 생성의 가능성으로 본다. 또한 들뢰즈/가타리는 ‘기계’ 개념을 자주 언급하였다. 우리는 흔히 달인의 경지에 오른 사람들을 두고 기계 같다는 표현을 쓰는데 들뢰즈의 기계는 숙련도와 생산량과는 거리가 있다. 슬라보예 지젝에 따르면 “그것은 은유의 관계(”“인간을 대체하는 기계”라는 낡고 따분한 주제)가 아니라 변신의 관계, 인간의 “기계-되기”의 관계이다.” 송민규가 기계처럼 비인격체가 되어 그림을 그리는 노동, 혹은 이미지를 생산하는 방식과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다루는 욕망과 기계-되기의 개념 사이의 관계를 통하여 해석의 단초를 찾아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오이디푸스는 운명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신화의 서사상을 따른다. 따라서 운명은 피할 수 없는 본질이 되어 삶을 구속하기 마련이다. 송민규가 스스로를 기계화하여 개인성을 철저히 제어한 상태에서 생산하는 이미지는 ‘생산’ 자체가 바로 동력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더불어 이러한 행위는 재현이라는 의미화/기호화 과정으로부터 탈주하는 하나의 방법으로도 볼 수 있다.
사실 동시대 미술에서 모더니즘 미학의 강령을 따를 이유는 없다. 재현도 마찬가지이다. 무조건적인 재현의 부정이 또 다른 관습이 되어 인식의 전형을 세습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송민규는 재현의 부정과 이미지 생산의 방식의 관계항을 형식, 기술, 매체와 공상과학이라는 순전한 허구이자 또 다른 이상의 세계로 설정하여 우리에게 미래라는 서사를 보여주는 대신 기계과학으로 이뤄진 건조하지만 멜랑콜리한 허구의 정서(atmosphere)를 제시한다. 스스로 기계가 되어가는 과정은 철학적 관점의 사유뿐만 아니라 매우 낭만적인 서사를 떠올리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