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준 (기계비평)
송민규의 그림은 도무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가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영원히 그림을 그리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이다. 오랜 세월을 하루에 한 장씩 혹은 그 이상을 빼지 않고 그린 결과 그의 앞에는 무수한 그림이 쌓여 있다. 그의 그림은 끝날 리가 없다. 왜냐면 세상의 그림에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세상의 그림들
사람 눈에 띄건 안 띄건 세상은 온통 그림이다. 소리마저도 그림이다. 우리는 어떤 소리를 들으면 마음속에 어떤 심상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때 심상(心象)이란 마음의 그림이다. 좀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이 세상은 현전할 때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 현전이라는 것이 그림이다. 즉, 눈앞에 있는 그림이다. 물론 그 그림이 다 종이 위에 그린 그림은 아니다. 어떤 그림은 구름의 형상처럼 허공에 떠 있고 어떤 그림은 유령처럼 마음속에 있으며 어떤 그림은 수학자의 공식처럼 추상의 영역 속에 있다. 사람들이 ‘미술’이라고 이름 붙인 그림은 그 무수한 그림 중 일부일 뿐이다. 그런데 미술이 답답한 것이, 세상에 하고많은 그림이 있건만 그것들을 다 껴안을 생각을 안 하고 일단 도화지에 비례부터 잡고 시작한다. 그다음에 아그리파를 그리고 줄리앙을 그리고 한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사람이 이 세상의 광대한 그림의 바다를 한꺼번에 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송민규는 그 광대함을 알아차렸다. 그가 택한 방법은 끊임없이 그리는 것이다. 백남준은 라인강의 물결을 센다고 해 놓고선 3만 개까지 셌다고 하는데 지구 전체의 대양의 물결은 수천억조 개에 이르지 않을까 싶다. 인간이 그 물결들만 그린다고 해도 한평생에 다 못 그리고 죽는다. 그러니 송민규의 그림이 끝날 리가 없는 것이다. 이게 시간적으로 끝난다 아니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송민규는 그림이라는 세상 속에 살고 있다. 우리가 산소 세상에서 한시도 산소를 숨 쉬지 않고 살 수 없듯이 그림 세상에 사는 송민규는 한시도 그림을 안 그리고 살 수가 없다.
송민규의 그림은 단 하나도 같은 것이 없는데, 그 이유는 이 세상이 무한개의 요소로 돼 있고, 그 요소들은 전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송민규의 그림 전체는 이 세상 전체에 대한 알레고리라고 할 수 있다. 알레고리라는 말의 어원은 그리스어의 ἄλλος(알로스), 즉 다름이다. 이질적인 것에 대해 신체가 이상 반응을 보이는 알레르기도 어원이 같다. 어떤 것에 대해 비유하는데 완전히 다른 것을 들이대는 것이 알레고리다. 많은 사람이 화려한 상품 세계를 보면서 성장이나 발전을 생각하는데 어떤 사람은 거기서 근대의 폐허를 본다. 그것이 발터 벤야민의 알레고리다. 송민규가 그림을 아무리 많이 그린다고 해도 이 세상에 있는 무한대의 그림을 따라갈 수는 없으므로 송민규의 그림과 세상의 그림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한다. 그 간극에서 오는 다름이 알레고리의 근원이다.
이 세상이 무수한 차이로 되어 있는 만큼 송민규의 그림도 무수한 차이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그가 그린 수많은 그림은 매우 자연스럽게 다르다. 오늘은 또 어떻게 어제와 다른 그림을 그릴까 고민하며 그린 그림이 아니다. 송민규의 그림은 이 세상 전체를 껴안으려고는 하지만 살짝 다르다는 것이다. 매일 그리는 그림인데도 다 다르고, 색채와 형상이 하나도 흥미롭지 않은 것이 없어서 처음에는 그가 천재인가 생각했다(물론 천재일 수도 있다. 아직 수학 테스트를 해보지는 않았다). 어떤 것은 사각형의 픽셀 패턴, 어떤 것은 부정형의 추상 패턴, 어떤 것은 춤추는 듯한 곡선 형상, 어떤 것은 교차하는 직선, 어떤 것은 00000 이런 식으로 그의 그림을 말로 따라가다 보면 지쳐 죽을 것 같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따라가다 보면 지쳐 죽듯이 말이다. 이 세상의 그림이 통째로 송민규에게로 엎어진 것이다. 그러니 구름이나 물결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그의 그림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솜씨 부릴 줄 아는 솜씨
그림을 많이 그린다는 것이 작가의 미덕은 아니다. 송민규의 그림에는 많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점이 있는데, 그것은 아름다움이다. 아름답다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이기 때문에 뭐라 논리적으로 증명하기가 어렵다. 상식적으로 말하면 색과 형태의 적절한 조화라고 할 수 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조화 속에 무한 변주가 있고 어떤 변주도 반복되지 않는다. 한 개의 아리아와 30개의 변주곡으로 돼 있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듣는 듯하다. 송민규의 그림에서는 선이든 직사각형이든 얼룩무늬든 무한 변주를 보여준다. 거기다가 평면감, 깊이감, 물질감 등 여러 가지 차원의 변주가 더해지고 곱해지니 그 경우의 수는 눈이 어지러울 정도다.
그런데 요소를 조금씩 바꿔서 늘어놓는다고 해서 좋은 그림이 될까? 뭔가 더 있지 않을까? 여기까지는 이 세상의 차이가 알아서 송민규의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온 덕에 그렇게 다양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고 치자. 그럼 작가는 세상이 걸어 들어오기를 기다리기만 하는 사람인가? 일단 세상이 송민규에게 열렸기 때문에 다양한 시리즈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작가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는 세상을 새로이 그려내는 존재다. 그러려면 뭐가 필요할까? 열린 눈, 열린 마음, 열린 손이 필요하다. 그중에서 하나만 빠져도 그림은 나오지 않는다. 게다가 송민규는 솜씨도 갖추고 있다. 작가치고 솜씨가 없는 사람이 있을까? 기술미디어가 발달하다 보니 기술의 터치에 가려 손의 솜씨는 보이지 않는 시대가 됐고 미술에서 누구도 솜씨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 말은 목공예 같은 데서 쓰이지 않을까 싶다.
솜씨란 기술(technic)이나 기예(craftsmanship)와 다르다. 솜씨는 무작정 여러 번 연습한다고 생기는 것도 아니고 타고 나는 것도 아니다. 솜씨는 다른 차원을 향하여 열린 태도가 있을 때 생기는 것이다. 연필로 선을 긋는다고 치자. 작가는 한번 선을 긋고는 생각한다. 물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이 선이 잘된 것인가, 다른 형상을 그릴 수는 없나, 더 빠르게 혹은 느리게 그릴 수는 없나, 무엇을 닮게 그릴 것인가 아무것도 안 닮게 그릴 것인가, 희극적으로 그릴 것인가 비극적으로 그릴 것인가 등등. 그다음의 선이나 터치에는 이 생각의 결과가 반영돼 있다. 그런 무수한 생각과 실행의 쌍이 쌓여서 다른 경지에 이르게 하는 능력이 솜씨다. 밥아저씨의 재주를 솜씨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는 그의 그림에는 붓질 한번 해 놓고 생각해 보는 성찰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쉽죠’를 연발하며 재빠르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다(송민규와 밥아저씨를 비교하는 것은 작가에게 실례이긴 하지만 설명하려니 어쩔 수가 없다).
기술미디어가 발달하지 못한 시절의 옛 대가의 작업에는 성찰의 개념이 담긴 솜씨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겸재가 그린 소나무는 얼핏 보기에도 한국 사람이 좋아하는 독야청청의 기운을 잘 품고 있다. 그런데 겸재는 소나무 하나 그리는 데 터치를 많이 쓰지 않았다. 왜 그런가 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터치 하나마다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대상으로 삼은 소나무 잎이 실제로 조금씩 달라서 그것을 반영해서 그럴 수도 있고, 위에 말한 성찰의 실행으로서의 솜씨가 발휘되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즉, 겸재의 소나무 잎에는 문인화의 전통에서부터 실제 소나무를 관찰하고 얻은 감흥에 자신의 경지에 대한 추구에 이르는 여러 차원이 겹쳐져 있어서 그리도 가슴 여미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겸재만이 아니라 추사나 세잔, 고흐 등 옛 대가의 그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바다. 송민규의 그림이 그들의 연장선에서 솜씨를 발휘하고 있다고 하면 너무 거창한 얘기일지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송민규의 그림은 손 노동의 결과라는 것이다. 사실 노동이란 사람이 자기실현을 하는 소중한 기회이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는 노동을 통한 자기실현의 기회로부터 소외돼 있는 반면에 예술가의 노동은 온전히 자기실현의 기회가 된다. 그래서 예술에서 손의 노동이 중요한 것이다.
그 노동의 역사는 아주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18,5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사람은 항상 그림을 그려 왔다. 이 세상이 그림으로 돼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림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사람들의 습성 때문이기도 하다. 사람의 손끝만 그림을 그린 게 아니라 세상 전체가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 결과가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풍요로운 그림의 세계다. 기후변화의 위기도 터키에 시뻘겋게 산불이 타는 그림을 봐야 실감이 나고 그린란드의 얼음이 녹은 그림을 봐야 받아들여진다. 주식 시세가 떨어졌다고 말로만 하지 말고 그래프로 보여줘야 실감한다. 그러니 송민규가 끝없이 그림을 그리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앞에서 알레고리에 대해 말한 것을 되풀이하면, 세상의 그림과 송민규의 그림이 같지는 않다. 그래서 송민규의 그림이 세상의 그림에 대한 알레고리라는 것이다. 그가 그림을 많이 그리면 그릴수록 그의 그림과 세상의 그림은 점점 더 달라져 간다. 그리하여 마침내 송민규는 자기의 그림 세상을 따로 또 만들게 될 것이다. 그런 또 다른 세상을 요즘 메타버스니 다중우주니 새삼스럽게 호들갑들을 떠는 것 같은데, 송민규의 그림은 몇 만년 된 습관의 연장선에 있을 뿐이다. 그러니 작가에게 새로운 것을 하라, 뭔가 다른 것을 해 보라고 요구할 필요도 없다. 세상이 그림인 만큼 그의 그림도 나오는 것인데 말이다.
차이의 차이의 차이
송민규의 그림에는 미세한 차이가 빛나고 있다. 차이란 단순히 ‘A는 B가 아니다’라는 명제로 축소될 수 있는 단순한 사실일까? 이 세상의 차이는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끊임없이 유동하고 생성하고 있는 중이다. 이것과 저것이 달랐다가 같은 것이 되고 같은 것이었다가 다른 것이 되기도 한다. 또한 차이의 양상도 계속 변한다. 물리적으로 보아도, 이 세상을 이루는 수많은 분자는 절대온도 0도(섭씨 영하 273도)에 있지 않는 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물질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이런 분자운동이다. 그런 분자운동이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면 지각과 감각의 차이를 만들어 내고 감각의 차이가 추상화되면 사고의 차이가 만들어진다(물론 이렇게 순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은 그런 온갖 종류의 차이를 빚어내는 수많은 떡 방앗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송민규의 그림은 바로 그런 떡 방앗간에 줄을 대고 있다. 그러니 그의 그림이 소진될 수는 없을 것이다. 소진되기는커녕 한 장 그릴 때마다 새로 태어난다. 차이는 생명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르면 이 세상 모든 것은 제멋대로 흩어지게 돼 있다. 에너지는 시간이 지나면 흩어지게 된다. 뜨거운 물을 컵에 담아두면 식는 이유는 뜨거운 물에 들어 있는 열에너지가 컵 바깥으로 흩어져 컵 안과 밖이 평형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명체는 에너지를 유지하여 엔트로피를 감소시킨다. 그러기 위하여 생명체는 자기 몸 바깥과 계속 차별성을 유지해야 한다. 물고기는 물과 달라야 하며 동물은 흙과 달라야 한다. 생명체가 죽으면 이 차이를 유지할 수 있는 힘이 사라지고 물고기의 몸은 흩어져서 물이 되며 동물의 몸은 흩어져서 흙이 된다. 생명이 아름다운 이유는 엔트로피를 감소시켜 가면서 차이를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보존은 정적인 작용이 아니다. 몸 안에서 계속 신진대사가 활발히 일어나서 에너지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차이가 보존되는 것이다. 그리는 그림 하나하나가 마치 각각의 분자처럼 미세한 차이를 만들어 내는 송민규의 그림은 생동하는 차이를 품고 있고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다. 그런데 그림을 엔트로피나 생명체와 연관하여 설명하기 힘드니까 사람들은 형식이 어떻고 조화와 비례가 어떻고 다른 소리를 하는 것이다.